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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 철학 사상과 현재로의 연결

by tistorybella 2025. 4. 8.

매트릭스

 

중국인 사상의  밑바탕에는 도교가 있고 그 사상의 대표자는 노자와 장자이며, 노자와 장자는 동양철학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의 두 명이다. 인간은 자연과 우주의 티끌과 같은 구성물일 뿐이므로 인간 중심으로 보는 것을 반성하고 대우주 속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라고 한다. 대우주의 속성은 자연친화적이며 여성적이다. 道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써 마땅한 도리이며. 德은 도(원리)를 인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1. 노자의 철학 사상

도덕경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이 강조되었다는 의미이다. 책을 구하기 쉽지 않은 시절에 이 책을 누가 읽었을까? 성인이 되고자 하는 후왕들이 독자였으며, 통치와 통치자를 위한 책이었다. 成人은 이상적 통치자로서 천지의 작용에 유비적으로 도를 행하는 도의 집행자이자 도의 주체이다. 後王은 노자가 말하는 성인 혹은 도의 모범을 따라야 하는 현실적인 노자의 독자이자 도덕의 실행이 요구되는 모방자이다. 논어와 맹자는 모든 사람이 성인 될 가능성을 말하지만 노자의 정치적 처세훈은 황제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노자에 나오는 은 생물학적 본성이나 인습적 행태를 보이는 본성적 인간, 타산지석이 되거나 배움의 대상이 되는 인간이다. 노장적 인간형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위 진의 정권교체기에 등장한 죽림칠현처럼 속세를 등지고 청담하며 은일자적하는 민간의 이야기와 함께 형성된 인간형으로 장자 사상에 더욱 부각한다. 역사적으로 노자 속에 표현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 청니리 황제 옹정제의 밀접제도가 상징하는 것은 정보의 장악과 권력 유지의 관계성이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 멀리 나서면 나설수록 아는 것은 점점 작아진다. 이 때문에 성 안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이름을 말하고,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사람을 어떻게 조직하고 정보를 어떻게 획득 활용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만약 황제에게 천하를 거미줄처럼 종횡무진하는 정보망이 갖추어져 있다면 그는 궁성을 전혀 나가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꿰뚫을 수 있다. 지역마다 마을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정보수집을 담당하고 이를 보고하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세워 놓는다면 천하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권력의 기술이다. 싸우지 않고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고서도 잘 응하며, 부르지 않고서도 스스로 찾아오고, 느긋해 하면서도 잘 도모한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권력의 기술 언어의 달인이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요,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통제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중후하다고 하고 자신이 자리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을 고요하다고 한다. 무게가 있으면 능히 가벼운 자를 부릴 수 있고 고요하면 능히 조급한 자를 부릴 수 있다. 그래서 무거움은 가벼움을 부리는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을 보리는 군주가 된다. 진정으로 무거운 것은 우리의 삶이다. 통치자는 서민의 무거운 삶을 보는 중후함이 있어야 하며, 인간 개개인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다가가야 한다.

2. 장자의 철학 사상

장자는 자유분먕하고 거침없는 언사로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성찰을 한 인물로 변화를 강조하였다. 장자가 노자의 계승관계라 할 수 없다. 정치적 맥락은 있으나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인간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였다. 공자와 맹자가 정언을 이야기한데 반해 장자는 우언을 이야기하며 우화처럼 빗대어 표현한다. 장자는 사실 관계를 따지기보다는 현실비판을 위하여 빗대어 표현하므로 현재에 더 각광받는다.. 국가, 제도, 권력, 유가의 도덕규범,, 법가의 형벌제도 등을 비판하였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대붕은 일상적 가치에 얽매임을 상징하는 매미와 작은 비둘기에 대비하고 붕새의 비상은 편협하고 자기중심적 편견을 벗어난 관점과 시야의 확장을 주장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란 개구리가 메추라기가 되는 것처럼 사물을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특징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우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변화를 예시한다. 변화는 곧 초월과 자유, 작은 지혜에서 더 큰 지혜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다. 변화와 자유는 계속되는 여정과 상태에서 얘기되는 것이지 완결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맹자의 는 배타적 보편성(성선설)을 갖지만 장자에 나오는 붕새와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이다. 장자의 옳고 그름은 저마다 살아가면서 형성된 성심에서 나온다. 서로 상대적 타당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조화를 추구하지는 않는 상대주의와 또한 다르다. 상대적인 타당성만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조화로운 공생을 말하는 것이다. 은 인간 마음의 타고난 성향이나 경향들로 착하거나 나쁘거나 하는 본성, 즉 인간이 타고난 것이다. 成心은 살아가면서 이루어지는 마음이다. 조화와 소통의 고민을 해결하는 키워드가 변화이다. 유연성을 잃은 성심은 편견과 독단이 될 수 있다. 장자는 자기 독단적이고 오랜 시간 굳어진 성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자가 두 가지 옳음을 구별한다. 爲是는 각자 자기의 성심을 기준으로 시비를 판단한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이미 정해진 기준과 답이 있다는 것이다. 因是는 상황의 구체적 맥락과 거기에 얽혀 있는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공감)하여 설정되는 창조적 옳음이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장자에서 는 부정적 표현이다. 無己, 喪我, 忘己, 虛己 등은 긍정적 표현이다. 자기부정의 주장은 곧 유연한 성심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이 된다. 장자 존재론의 근본 개념인 기에서 개체는 다양한 힘들이 모여 유지되는 하나의 복합체이다. 장자는 생명을 물이 아닌 기의 관점으로 본다. 힘들의 균형으로 생이 유지되고 깨지면 우주로 흩어진다. 균형의 균열은 질병이고 힘들의 해체는 죽음이다. 이를 기의 이산취합이라 한다. 인간 존재는 자신과 외부의 힘이 소통 순환하며 변화 속에 놓인 존재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자기나 자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꿈을 꾸기 전에 장주는 자신이 장주인 줄로만 안다. 장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나비가 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비는 자신이 나비인 줄로만 알고 장주인 줄은 모른다. 꿈에서 깨어난 뒤 그는 더 이상 꿈꾸기 전의 장주가 아니다 꿈꾸기 전에는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몰랐지만 꿈을 꾸고 난 뒤에는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깨달으면서 장주로서의 동일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어느 날 장자는 까치가 사마귀를, 사마귀가 매미를 노리고 있는 순간을 목격한다. 순간 장자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달아나지만 이마 숲의 관리인이 쫓아오며 그에게 욕을 해댔다. 집으로 돌아온 장주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세상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 내고 어떻게 소통하고 공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자기 보존이 아닌 자기 변화와 자기 망각을 추구하며, 자기 보존의 관심을 넘어서 자기 해체를 의미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는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철학이다. 일단 완성된 형체를 부여받으면 곧장 죽지는 않는다 해도 언젠가 다하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다른 사물들과 서로 베고 쓰러뜨리고 하면서 소진시키는 것이 마치 말을 달리는 것과 같아서 멈추게 할 수가 없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장자의 아러한 태도는 단순히 삶에 대한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니라 각성적 반응임을 강조한다. 삶이 주는 덧없음과 허무함은 우리가 외면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의 관점이 아닌 의 관점에서 시작과 끝은 의미가 없다. 장자는 죽음을 변화의 극한으로 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인간적 개체로서 존재 방식이 다른 존재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했다. 인간의 인식 능력 밖에 우리의 의지와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 운명이다. 운명이 나를 해체하고 나를 구성하던 힘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운명의 긍정이다.

3. 노장사상의 현재로의 연결

장주의 나비의 꿈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 가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지금 이 공간에 존재하는 내가 정말 나인가? 누군가의 허상인가?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이 소재는 메트릭스나 인셉션 등 많은 영화에서 차용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현실이라 여기던 것이 어느 날 거짓임을 알게 된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게 되는 빨간 약과 행복한 거짓을 누리게 될 파란 약을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더 나아가 최근 과학계의 핫 이슈라 할 수 있는 양자역학 또한 노장사상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평행 우주가 있어 모든 공간과 시간에 내가 존재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의 삶에서 소통과 공감을 위해 너무나 필요한 철학이라 생각한다.